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은 동아시아 건축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신라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완공된 이 거대한 목탑은 상륜부 42척을 포함해 총 225척의 높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현대적 단위로 환산하면 고려척 기준 약 80m, 당척 기준으로는 약 66.70m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목조 건축물 중 하나였던 이 웅장한 구조물은 신라의 국력과 불교 문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였습니다.
황룡사의 창건 배경과 역사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3년에 처음 계획되었습니다. 진흥왕 14년,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진흥왕은 그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도록 명하여 '황룡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후 선덕여왕 시대에 이르러 자장의 건의에 따라 9층 목탑이 건립되었고, 이로써 황룡사는 신라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9층 목탑의 상징적 의미
황룡사 9층 목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정치적, 종교적 상징을 담고 있었습니다. 각 층은 신라를 중심으로 주변 아홉 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 1층: 왜국(倭國)
- 2층: 중화(中華)
- 3층: 오월(吳越)
- 4층: 탁라(托羅)
- 5층: 응유(鷹遊)
- 6층: 말갈(靺鞨)
- 7층: 거란(契丹)
- 8층: 여진(女眞)
- 9층: 예맥(穢貊)
특히 5층의 응유는 신라가 백제를 낮추어 부른 명칭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목탑은 신라의 대외 인식과 외교 관계를 반영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황룡사의 멸실과 현재
안타깝게도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소실되었습니다. 한때 신라 불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웅장한 사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현재는 황룡사지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남아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룡사 관련 주요 인물
황룡사와 9층 목탑의 역사에는 중요한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 진흥왕: 황룡사 창건 시작
- 선덕여왕: 9층 목탑 건립 주도
- 자장: 9층 목탑 건립 건의
신라의 영광을 상징했던 황룡사 9층 목탑은 비록 실물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기록을 통해 그 웅장함과 의미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